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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과 럭셔리 브랜드의 특별한 인연

  • 4일 전
  • 5분 분량

오랜 역사와 확고한 브랜드 정체성을 통해 고유한 가치와 미학을 전하는 명품 브랜드가 와인 산업과 협업하는 사례는 더 이상 드문 일이 아니다. 두 산업 모두 시간과 기술이 축적된 장인정신을 핵심으로 삼으며, 세대를 이어온 노하우가 스타일과 품질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패션 하우스의 오트 쿠튀르가 장인의 손길로 완성되듯이 와인 또한 포도 재배부터 양조, 숙성까지 세심한 관리와 긴 시간이 필요하다.


(왼) 불가리 창립자에게 헌정한 와인, 소티리오, (오) 포데르누오보 설립자, 조반니 불가리.

 와인 애호가뿐 아니라 일반 소비자에게도 잘 알려진 와인 브랜드 중에는 이미 럭셔리 그룹과 인연을 맺고 있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 예가 LVMH로, 패션뿐 아니라 주류 사업도 활발히 운영하고 있다. 이 그룹이 소유한 와인 브랜드에는 돔 페리뇽(Dom Pérignon, 크루그(Krug), 모엣 & 샹동(Moët & Chandon), 뵈브 클리코(Veuve Clicquot), 샤토 디켐(Château d’Yquem) 등이 포함된다. LVMH는 2022년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Napa Valley)의 조셉 펠프스 빈야드(Joseph Phelps Vineyards)를 인수하는 등 프랑스 외 지역으로도 와인 포트폴리오를 확장하고 있다. 프랑스의 또 다른 럭셔리 그룹 케링(Kering)은 보르도 그랑 크뤼 1등급인 샤토 라투르(Château Latour)를 비롯해 부르고뉴의 도멘 유제니(Domaine d’Eugénie), 북부 론의 샤토 그리예(Chateau Grillet), 나파 밸리의 에이슬 빈야드(Eisele Vineyard) 등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와이너리를 소유하고 있다. 걸출한 두 럭셔리 그룹의 행보 외에도 패션 브랜드들이 와이너리를 통해 브랜드 세계관을 확장하는 흐름이 눈에 띈다. 불가리, 샤넬, 페라가모 등이 대표적이며, 이들 모두 마케팅 차원을 넘어 포도밭과 와이너리를 직접 운영하며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포데르누오보의 빈야드.
포데르누오보의 빈야드.

불가리의 빛나는 프로젝트, 포데르누오보

불가리는 패션 분야에서 쌓아온 명성을 와인 분야에서 이어가며 이탈리아의 장인정신과 현대적 감각을 와인으로 선보이고 있다. ‘새로운 포도원(New Estate)’이라는 의미의 포데르누오보(Podernuovo)는 불가리 창립자 소티리오 불가리(Sotirio Bvlgari)의 4대손, 조반니(Giovanni)가 설립한 와이너리다. 그는 아버지 파올로(Paolo)의 뒤를 이을 수도 있었지만, 새로운 비전을 펼치기 위해 토스카나 의 포도밭으로 시선을 돌렸다.

 

2000년대 초, 그는 팔라초네(Palazzone) 마을의 땅을 매입한 뒤 개간했고, 2007년 포도나무를 식재한 뒤 2009년 첫 빈티지의 포도를 수확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자연에 대한 존중과 와인에 대한 열정을 길잡이로 삼았다”는 조반니의 말처럼, 포데르누오보 와이너리는 포도밭 뿐 아니라 양조 과정에서도 자연을 존중하며 환경에 부담을 주지 않는 방식을 추구한다. 2012년에 완공된 와이너리 건물은 아름다운 토스카나의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됐고, 지열 냉난방 시스템과 태양광 패널을 활용해 탄소 배출을 최소화한다.

현재 26헥타르(26만m²)의 포도밭을 운영 중인 포데르누오보는 산조베제, 카베르네 프랑,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등 다양한 품종을 재배한다. 움브리아 지역에도 일부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는데, 이곳은 샤르도네와 그레케토 같은 화이트 품종 재배에 적합하다. 와인 생산 과정이 대부분 수작업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명품 제작 과정과 비슷하다. 품질을 위해 포도 수확량을 제한하고 손으로 수확한 포도를 엄선해 사용하며, 테루아와 포도 본연의 특징을 섬세하게 살리는 데 집중한다.


토스카나에 자리한 포데르누오보 와이너리 건물.
토스카나에 자리한 포데르누오보 와이너리 건물.

포데르누오보에서 생산하는 와인 중에는 불가리 가문의 선조에게 헌정하는 와인도 있다. ‘스피리디오(Spiridio)’는 불가리 창립자 소티리오 불가리의 막내아들 스피리디오네(Spiridione)의 이름을 본뜬 와인이다. 자유롭고 낙천적이던 인물의 성격을 반영하듯, 그에게서 영감받은 이 와인은 젊고 현대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신선한 딸기와 라즈베리 아로마가 생동감을 전하며, 산조베제의 우아한 꽃 향이 이어지는 와인으로, 다양한 음식과 즐기기 좋다. 불가리 창립자에게 헌정한 ‘소티리오(Sotirio)’는 포데르누오보의 아이콘 와인으로 꼽힌다. 싱글 빈야드에서 재배한 산조베제 100%로 양조하며, 잘 익은 과일 향과 복합적 향신료 향이 어우러진다. 부드러운 질감과 긴 여운이 이어지는 와인으로, 20년 이상 숙성 잠재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다. 아름다운 자연에서 공들여 빚어낸 또 하나의 명품이라 할 수 있다.

 

생 수페리 와이너리.
생 수페리 와이너리.

나파 밸리에 펼친 샤넬의 비전, 생 수페리

샤넬은 1994년 보르도 마고 지역의 샤토 로장 세글라(Château Rauzan-Ségla)를 인수하며 와인 산업에 진출했고, 파인 와인 생산을 위해 장기적인 투자를 이어왔다. 나파밸리의 생 수페리(St. Supéry)는 샤넬이 2015년 미국으로 와인 사업을 확장하며 인수한 와이너리다. 현재 나파 밸리에는 550여 개 와이너리가 있지만 모든 와인을 직접 소유한 포도밭에서 재배한 포도로 생산하는 ‘100% 에스테이트’ 와이너리는 극소수이며, 생수페리가 그중 하나다. 약 620헥타르(620만m²)의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으며, 포도밭과 와이너리 운영 전반의 지속가능성을 평가하는 ‘나파 그린(Napa Green)’ 인증을 받은 친환경 와이너리로 알려져 있다.

 


(왼) 생 수페리 달라하이드 에스테이트 빈야드 소비뇽 블랑, (오) 생 수페리 CEO 에마 스웨인과 양조 책임자 마이클 숄츠.

지난해 서울을 찾아 한국의 와인 애호가들을 만난 생 수페리 CEO 에마 스웨인(Emma Swain)은 “샤넬과 생 수페리는 품질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철학을 같이한다”고 밝혔다. 생 수페리는 여러 투자자와 접촉했지만, 결국 샤넬과 인연을 맺은 이유는 브랜드의 가치관이 맞았기 때문이다. 생 수페리 양조 책임자이자 현재 부사장을 맡고 있는 마이클 숄츠(Michael Scholz)는 세계적 와인 컨설턴트 미셸 롤랑(Michel Rolland)과 오랜 시간 협업하며 와인의 스타일과 품질을 발전시켜왔다. 샤넬이 인수한 이후로는 더욱 적극적인 투자가 이뤄지며 광학 포도 선별, 소형 오픈 톱 발효 탱크, 맞춤형 프랑스 오크통 도입 등 양조 시설 전반을 업그레이드했다.

 

석양이 질 무렵, 생 수페리의 빈야드 풍경.
석양이 질 무렵, 생 수페리의 빈야드 풍경.

생 수페리가 뛰어난 싱글 빈야드 포도밭인 달라하이드 에스테이트 빈야드(Dollarhide Estate Vineyard)에서 생산하는 와인은 에스테이트를 기반으로 한 와이너리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달라하이드 에스테이트 빈야드 소비뇽 블랑(Dollarhide Estate Vineyard Sauvignon Blanc)’은 100% 소비뇽 블랑을 사용하고, 일부는 오크 발효를 통해 보디감을 더했다. 소비뇽 블랑에 기대하는 신선한 풍미와 함께 입안에서 구조감과 풍부한 질감이 느껴진다. 레드 와인 ‘달라하이드 에스테이트 빈야드 카베르네 소비뇽(Dollarhide Estate Vineyard Cabernet Sauvignon)’은 모래와 자갈 토양에 깊게 뿌리내린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포도를 사용하고, 19개월간 프렌치 오크에서 숙성했다. 블랙 체리와 다크 초콜릿, 에스프레소 뉘앙스가 조화로운 매력적인 풀 보디 와인이다.

 


(왼) 일 보로 와이너리가 자리한 마을 풍경. (오) 일 보로의 플래그십 와인, 일 보로.

페라가모가 만들어가는 와인 헤리티지, 일 보로

페라가모 가문은 가족들이 종종 휴가를 보내던 지역에서 와인 사업을 시작했다. 1993년 페루초 페라가모(Ferruccio Ferragamo)가 토스카나 발다르노(Valdarno) 계곡에 자리한 일 보로를 매입하며, 중세 시대부터 귀족 가문이 소유해온 부지에서 새 역사가 시작됐다. 당시 일 보로는 한동안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됐지만, 페라가모에 인수된 뒤 지역 장인들의 손길로 복원 프로젝트가 진행되며 오래된 마을이 세심하게 재건됐다. 전통적 모습을 되살린 이곳은 아름다운 풍광과 토스카나 농가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곳으로 거듭났다. 약 85헥타르(85만m²)의 빈야드에서 포도를 재배하며 와인을 생산하고, 약 300헥타르(300만m²) 부지는 올리브 오일 생산을 포함한 다양한 농업 활동에 활용된다.

 

현재 페루초 페라가모의 아들 살바토레(Salvatore)와 그의 여동생 비토리아(Vittoria)가 일 보로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다. 2024년에는 1874년 설립된 선구적 와이너리 테누타 피니노(Tenuta Pinino)를 인수하며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로 영역을 확장했다. 이를 통해 와인의 품질과 영향력 측면에서 더욱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왼쪽부터) 살바토레 페라가모, 비토리아 페라가모, 페루초 페라가모.
(왼쪽부터) 살바토레 페라가모, 비토리아 페라가모, 페루초 페라가모.

일 보로는 2010년대 초부터 유기농으로 전환해 2015년 유기농 인증을 받았다. 살바토레 페라가모 대표는 “유기농 재배는 인증을 받기 위한 작업이 아니라 설립 초부터 친환경을 추구하고 지속가능성에 집중해온 일 보로 와이너리의 철학에서 비롯되었다”라고 강조했다. 와이너리는 탄소 배출을 최소화하고 태양광 에너지를 활용하며, 생물 다양성 보존을 위한 지속 가능한 농업을 실천하고 있다.

 

와이너리의 플래그십 와인으로 꼽히는 ‘일보로(Il Borro)’는 메를로 50%, 카베르네 소비뇽 35%, 시라 15%를 블렌딩한 슈퍼 투스칸 와인이다. 농축된 검은 과일 아로마와 향신료, 부드러운 타닌이 특징이다. 반면, 산조베제 100%로 양조해 토착 품종의 매력을 보여주는 와인도 있다. ‘폴리쎄나(Polissena)’는 산조베제 특유의 산도와 신선한 과일 풍미가 섬세하게 드러나며 일 보로 테루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와인으로 평가받는다.

 


돈나푸가타의 포도원.
돈나푸가타의 포도원.

 럭셔리 브랜드와 와인의 감각적 만남

명품 브랜드가 와이너리를 소유하거나 생산에 직접 참여하지 않더라도 의미 있는 협업을 통해 기억에 남는 ‘경험’을 선사하기도 한다. 프랑스의 유서 깊은 샴페인 하우스 떼땅져(Taittinger)와 크리스털 브랜드 바카라는 한때 럭셔리 그룹인 떼땅져 그룹에 속해 있었다. 2006년 다른 소유주에게 인수되며 각각 독립된 회사로 다른 길을 걷게 됐지만, 두 브랜드의 인연은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 떼땅져의 최고급 라인인 프레스티지 퀴베 ‘콩트 드 샹파뉴(Comtes de Champagne)’ 광고 이미지에 바카라의 샹들리에나 플루트 글라스를 활용하는 등 여전히 ‘샴페인과 크리스털’이 만들어내는 반짝이는 미학을 이어가고 있다.


(왼) 돈나푸가타와 돌체앤가바나의 협업 와인, 탄크레디. (오) 바카라 글라스와 떼땅져 콩트 드 샹파뉴.

 패션 브랜드와 와이너리의 인상적인 컬래버레이션으로는 돌체앤가바나와 돈나푸가타(Donnafugata)의 만남을 빼놓을 수 없다. 시칠리아의 와이너리 돈나푸가타는 이탈리아의 프리미엄 와인 생산자 모임 ‘그란디 마르키(Grandi Marchi)’ 멤버로 이탈리아의 와인과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있다. 특히 시선을 끄는 라벨과 풍부한 스토리를 간직한 와이너리로 유명하며, 문학작품을 비롯한 예술에서 영감받은 와인도 여럿 선보였다.

 

돈나푸가타가 와인 생산을 맡고 돌체앤가바나가 레이블과 보틀 디자인을 담당한 컬래버레이션 와인은 그 자체로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2020년, 네렐로 마스칼레제(Nerello Mascalese)와 노세라(Nocera) 품종으로 만든 로제 와인 ‘로사(Rosa)’와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과 네로 다볼라(Nero d’Avola)를 블렌딩한 ‘탄크레디(Tancredi)’ 한정판 와인을 공개하자 세계적으로 품귀 현상이 나타날 만큼 큰 인기를 얻었다. 이에 호응해 두 브랜드는 이듬해에도 협업을 이어갔고, 시칠리아의 활화산 에트나(Etna)에서 탄생한 ‘이졸라노(Isolano)’와 ‘꾸오르디라바(Cuordilava)’를 새롭게 선보였다. 특히 돌체앤가바나가 시칠리아의 문화와 전통에서 영감받은 디자인을 라벨과 패키지에 적용해 ‘패션 브랜드의 감각을 입은 와인’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받았다. 두 브랜드의 협업은 시칠리아의 문화적 메시지를 담은 와인으로서 의미를 더한다.

 

글: 안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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