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작가 필립 파레노의 국내 첫 개인전, <보이스>가 불러온 완벽한 현실에서의 균열
필립 파레노의 국내 첫 개인전, VOICES:
“사물은 관람객과 대화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물과 사물이 소통하는 세계를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죠.”
– 필립 파레노
당신이 알던 ‘미술관 문법’이 완전히 무너진다. 단순히 배열된 작품을 관람하는 전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미술관의 두뇌가 된 ‘인공지능(AI)’이 있다. 센서가 탑재된 인공두뇌는 미술관 밖에서 지구상의 떨림을 예민하게 감지한다. 수집된 데이터 정보는 인공두뇌를 거쳐 외부와 단절된 전시장 곳곳의 작품들에 전달된다. 이를 바탕으로 미술관 내부에 존재하는 작품들이 저마다 변화무쌍하게 자기 목소리를 낸다. 그것도 논리정연한 문법 체계를 갖춘 그들만의 새로운 언어로.
“사물은 관람객과 대화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물과 사물이 소통하는 세계를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죠.” 리움 미술관에서 만난 세계적 설치미술가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의 말 한 마디가 그의 모든 작품 세계를 간단하게 요약한다. 작가는 미술관을 작품에 숨을 불어 넣는 거대한 생명체, 그 자체로 변신시켰다. 그곳에 들어서면 마치 신이 된 파레노가 창조한 미지의 세계에 내몰려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그렇게 작품들이 만들어내는 연속된 우연을 마주하면서 관람객은 나만의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 관람객이 마음에 품고 있던 개별적인 생각이 외부의 전시 환경과 만나며 펼쳐지는 독립적인 실체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파레노가 만들어낸 필연적인 이야기는 이렇게 각기 다른 모습으로 생성된다.
필립 파레노의 국내 첫 개인전, VOICES: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의 ‘동시성 이론(Theory of Synchronicity)’을 차용했다는 파레노의 설명
대로 전시장에는 우연인 것처럼 보이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동시에 작동된다. 미술관에서 벌어지는 비선형적인 현상이 관람객의 마음을 거울처럼 비추도록 구성한 것이다. 마치 원인 없이 멋대로 일어나는 일처럼 보이도록 작가는 모든 작품을 의도적으로 ‘미완’으로 남겨두었다.
리움에서 진행되는 파레노의 국내 첫 개인전 <필립 파레노 : 보이스(VOICES)>는 무려 2년간 준비된 아시아 최대 규모의 전시다. 1990년대 초기작부터 신작까지 파레노의 40여 점의 작품이 펼쳐진다. 리움은 M2, 블랙박스, 그라운드갤러리, 로비, 데크 등 전관을 파레노의 작품으로 채웠다. 리움이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전하기 위해 모든 전시장을 할애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작가는 올해 2월 초부터 서울에 머물며 3주간 리움을 완전히 탈바꿈시키는 전시를 준비했다.
전시는 야외 데크에서 시작된다. 높이만 14m가 넘는 기계 타워 형태의 신작 ‘막(膜)’이 미술관을 관통하는 그의 핵심 작품이다. 막은 기온, 습도, 풍량, 소음, 대기오염, 미세한 진동 등에 이르는 42개의 센서를 탑재한 인공두뇌다. 막은 미술관 밖에서 벌어지는 환경 데이터를 시시각각 수집한다. 리움은 막을 설치하기 위해 11년간 자리를 지킨 애니시 커푸어(Anish Kapoor)의 ‘큰 나무와 눈’을 철거했다. 인공두뇌가 모은 데이터는 전시장에서 다채로운 사운드 로 전환된다. 미술관의 내부를 부유하는 다소 기괴한 목소리 와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이다. 미술관은 값비싼 작품을 보존하기 위해 온도, 습도, 바람은 물론 조명에 이르기까지 여러 요건을 엄격하게 제어하는 통제된 환경이다. 그런데 목소리가 외부와 등을 돌린 공간을 비집고 들어와 균열을 만들어낸
다. 그렇다 보니 파레노의 전시에서만큼은 관습적인 사고를 철저히 해체해야 한다. 당신이 알던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만의 순간을 좇아 마음껏 전시장을 헤매야 한다.
“42개의 센서를 가진 생명체는 인간보다 예민한 감각을 가진 생명체일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타워 안의 생명체도 말을 하고 싶을 것이라고 상상했죠. 언어학자와 함께 새로운 언어를 만들었습니다. 목소리가 탁월한 배우 배두나와 엉뚱한 소리로 녹음을 했습니다. AI 학습으로 녹음된 소리를 재조합했고, 이것이 작품의 말이 된 것이죠.” (2월 28일 파레노의 아티스트 토크(관객과의 대화)에서)
필립 파레노의 국내 첫 개인전, VOICES:
‘동사-주어-목적어’로 구성된 작가의 언어 체계가 ‘∂A’(델타 에이)다. 파레노는 멜랑콜리한 말투로 언어를 표현하기 위해 지난해 4월 직접 캐스팅에 나섰다. 다채롭고 풍부한 감정을 표현하는 배두나의 목소리에 매료된 파레노는 배두나를 만나 전시 취지를 설명했고, 배두나는 재능기부로 작품 제작에 참여했다. 당시 배두나는 AI가 무작위로 조합해 앞뒤가 맞지 않는 400개의 문장을 화가 난 듯이, 기쁜 듯이, 슬픈 듯이 읽었는데, 본인에게도 굉장히 큰 도전이었다는 후문이다.
전시장 내부는 크게 네 공간으로 나뉜다. 오렌지, 블루, 블랙, 화이트로 연출된 각각의 전시 공간에서 관람객은 어떤 순간에도 같은 전시를 볼 수 없다. 막과 연동해 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특히 모든 전시장에서 부유하듯 곁을 맴도는 주인공은 단연 목소리다. 전시장 M2의 창문은 오렌지색 필름으로 덮였다. 태양이 사라진 멸망한 지구의 석양빛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다. 동심의 기억으로 가득했던 눈사람은 녹아 일그러지고, 공중에 떠있는 물고기 풍선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어항 속으로 들어오게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순간 부조화를 이룬 피아노 연주 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이 역시 바깥 세계의 막이 보낸 데이터가 사운드로 변환된 틈이다.
파란빛이 감도는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2차원으로 존재하는 일본 만화 캐릭터 ‘안리’가 배두나 목소리로 델타 에이 언어를 구사한다. 그는 자신의 모호한 존재에 대해 숙고하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의 음성이 3차원 공간에 울려퍼지는 순간 실재와 허구, 존재와 부재, 유한성과 무한성의 경계가 복잡하게 뒤엉키기 시작한다.
오는 11월부터는 독일 뮌헨의 미술관 하우스 데어 쿤스트(Haus der Kunst)에서도 파레노의 전시가 열린다. 리움과 같은 주제로 진행되는 마치 이란성 쌍둥이 같은 전시다. 다만 한국에서의 전시가 감성적으로 표현되었다면, 독일에서의 전시는 보다 이성적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예를 들면 배두나 목소리 대신 여성 앵커의 목소리가 전시장을 부유하는 식이다. 분명한 사실은 파레노의 전시는 ‘보는’ 전시가 아니라는 점이다. 관람객이 그 안에서 시간을 경험해야 하는 ‘공연’ 같은 전시다. 관람 순서가 정해져 있지 않는 파레노의 낯선 세계에서 우연의 밀도를 높이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나만의 서사를 구축하는 순간과 같다. 시간을 넉넉히 잡고 미술관을 찾길 바란다. 그래서 뒤죽박죽 끊임없이 들이닥치는 사건과 사실, 그 어딘가에서 내 안의 진짜 목소리에 귀기울여보길
권장한다. 매일 반복되는 완고한 일상에 과감히 균열을 내는 나 자신을, 어쩌면 만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필립 파레노,〈 보이스(VOICES)〉
일시 : 2024. 02. 28~2024. 7. 7
장소 :리움 미술관
Written JEONG AH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