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의 상징에서 권력의 심볼을 거쳐, 사회적 변화에 따라 장식적 가치로의 진화를 보여주는 티아라 이야기.
2017년 미키모토가 브랜드 창립 1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라 플로르 드 미키모토’ 티아라.
나폴레옹 대관식, 나폴레옹 왕관의 나뭇잎
1804년 12월 2일, 나폴레옹이 노트르담 성당에서 열릴 자신의 대관식 집전을 교황 비오 7세에게 요청했다. 교황은 나폴레옹에게 관을 씌움으로써, 카톨릭 교회와 관계가 좋지 않던 나폴레옹이 자신의 발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라 예상하며, 이를 통해 세상에 교회의 권위를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계산하고 이를 수락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교황의 손에서 관을 직접 가져가서 꼿꼿하게 서 있는 자세로 스스로의 머리 위에 황금 월계관을 씌우고, 조제핀의 머리 위에도 직접 황후의 관을 올렸다. 이 행동은 교황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키는 순간이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이 장면을 10미터가 넘는 유화로 기록했다. 이화려한 대관식은 권력이 타인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얻는 것임을 보여줬다.나폴레옹은 자신의 출신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고, 로마 황제의 관을 재현하여 동등한 지위를 얻었으며, 조제핀을 위해 빛나는 티아라를 주문해 그녀의 지위를 높였다. 이처럼 티아라는 권력과 지위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진주 티아라를 쓴 조세핀 황후, 20세기 초 티아라를 쓴 영국의 귀부인들
존경의 상징에서 자신의 표현 수단으로
티아라의 역사는 고대 이집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집트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부터 망자까지 모두에게
존경의 표시로 사용되었다. 그리스에서는 신을 찬양하는 상징으로 여겨졌고, 로마 시대에는 지위와 명예
의 상징, 왕권이 가진 절대 권력의 이미지를 대표했다. 중세시대에 봉건주의가 출현하면서, 머리 장식은 매우 중
요한 부분으로 여겨져 의상의 일부가 되었다. 왕족과 귀족 여성은 보석으로 장식된 화관 형태의 티아라를 지참금의 일부로 받았으며, 결혼 서약서에는 티아라에 사용된 금, 은, 보석, 진주 등의 가치가 명시되기도 했다. 이는 결혼의 의미와 고귀함, 귀족성을 상징했다. 16세기에 깃털 머리장식 등으로 대체될 것 같았던 이 풍습은 18세기에 사라질 듯했다가 18세기 말 고전주의의 부활로 다시 등장했다. 이 시기에 티아라는 금속세공에서 보석 중심의 형태로 변화했는데, 이는 아마도 보석의 발견과 수집의 결과일 것이다. 또한, 이 시기는 제국주의가 한창이었고, 신비로운 동양의 문화가 서구에 소개되어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름다운 보석들은 대를 이어 재세팅되었고, 티아라의 수는 급격하게 증가했다.
영국에서 티아라는 지위와 부를 상징하는 여성의 장식을 넘어, 국가의 번영과 위대함을 반영하는 자존심의 원천으로 오랜 기간 동안 자리매김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산업과 비즈니스를 통해 큰 부를 얻은 사람들이 귀족 신분을 얻을 수 있었다. 유럽 전역에서 공식 행사와 왕실 결혼식에서 티아라 착용이 관례화되면서 왕족, 귀족 가문, 금융 재벌 등이 보석을 점점 더 많이 구매하게 되었다. 각국의 왕실은 지정 보석상을 통해 화려한 걸작들을 주문했고, 이러한 수요 증가는 많은 주얼리 하우스의 발전을 촉진했다. 예술 발전에는 시대를 이끄는 예술가와 그들을 지원하는 후원자가 필요하듯, 이 시기는 보석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발전시킨 중요한 시기였다. 세계적인 브랜드들은 왕실과 귀족을 위해 보석을 수집하고, 디자인과 세팅 기법을 개발하여 열정적으로 많은 작품을 창조해냈다. 1909년, 영국의 잡지 『태틀러』는 부유한 계층의 여성과 대사 부인들이 다양한 행사에서 티아라를 착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부들은 결혼 선물로 여러 점의 티아라를 기대했고,화려한 결혼식의 경우 더 많은 수를 받기도 했다. 티아라는 신분 상승의 상징이자 자신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20세기를 화려하고 다양한 형태로 장식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티아라를 쓴 엘리자베스 여왕 2세, 쇼메의 엉 에르드 쇼메
시대에 따른 티아라의 의미
두 번의 세계대전과 경제대공황이 사회와 경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음에도, 티아라는 공식 자리와 사적인 행사에서 계속 등장했다. 20세기 초, 영국 여왕과 귀족이 참석하는 국가 행사에서 티아라 착용은 일반적이었다. 새로운 엔터테인먼트의 유행은 다양한 형태의 티아라 소유 욕구를 촉진시켰고, 유색석을 세팅한 티아라 컬렉션으로 다양성을 확대시켰다. 1921년, 티아라는 컬렉터들에게 가장 선호되는 주얼리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오페라 공연과 사적인 파티에서 티아라의 등장이 늘어났고, 파리의 주얼러들은 호황을 경험했다. 동서양의 아름다움을 결합한 아르데코 스타일은 불투명한 카보숑 형태의 보석을 장식한 티아라를 탄생시켰다. 이 시기는 이국적인 중국의 문양과 페르시아의 색감이 티아라 디자인에 영향을 미쳤다. 여성의 시대성을 반영하여 티아라는 보다 가볍고 새로운 디자인으로 제작되었고, 변형 가능한 주얼리의 개념이 도입되었다. 방도 형태의 주얼리는 팔찌와 티아라로 변형 사용이 가능했다. 이러한 주얼리는 착용하기 편리하고 다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컬렉터들에게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1929년 10월 주식시장 붕괴로 이 아름다운 시대는 갑작스럽게 종말을 맞았고, 주얼러들의 파산으로 티아라 제작이 중단됐다. 1937년 조지 6세의 대관식을 포함해, 왕족을 위주로 명맥을 유지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티아라는 다시 사라졌다. 그 후 1947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결혼식에서 티아라는 재등장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국이 산업과 금융에서 선두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유럽 귀족과 미국인의 결혼을 위해 티아라가 계속 제작되었다. 역사의 흐름은 티아라의 위치와 상징성을 변화시켰다. 20세기 경제적 변동은 티아라의 소재, 생산 방식, 형태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과거에는 지위와 부의 상징이었던 티아라가 20세기에는 왕족의 특별한 주문을 제외하고 주로 장식적이고 물질적인 가치를 나타냈다. 티아라 디자인은 20세기의 헤어 스타일과 이브닝 드레스에 맞춰 가벼워졌고, 세팅된 보석의 가치와 반짝임을 강조하기 위해 최신 커팅 기술을 사용해 광채를 냈다. 20세기에는 티아라가 장식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를 중심으로 호화로운 컬러와 형태로 20세기를 장식했다.
21세기의 티아라는 새로운 소재와 제작 방식으로 존재한다. 럭셔리 주얼리 하우스의 티아라는 오랜 시간 동안 형성된 가치 있는 천연 보석과 과학 및 장인 정신의 결합을 통한 제작 과정, 새로운 소재를 사용해 대담하고 로맨틱한 디자인으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주얼리의 역사는 인류와 함께 발전해, 유한한 인간의 삶에서 소중한 순간들을 영원으로 변화시키는 매개체가 되었다. 이 아름다운 물건에 대한 동경과 영원에 대한 갈망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written by MIN JEONG KANG